지난 칼럼에 이어 성남의 인물 백헌 이경석(李景奭: 1595-1671) 이야기를 이어 나가보고자 한다.
문장이 뛰어났던 이경석은 병자호란 종전 이후 「대청황제공덕비」, 소위 ‘삼전도비’의 문장을 썼다가 훗날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아무도 맡지 않으려는 일에 책임을 졌기에 벌어진 일이었다. 병자호란 이후 조선 정부가 직면한 최대 문제는 청나라와의 관계 설정 문제였다. 이 분야에서도 이경석은 묵묵하게 자신의 소임과 역할을 다했다.
병자호란 이후 10년, 당시 국제정세는 이러했다. 1644년, 청은 드디어 숙원 사업이던 북경을 점령하고 중원의 패자를 자처했다. 명의 부활을 기대했던 조선에게는 이는 그다지 좋은 소식은 아니었다.
그러나 소식은 끊겼지만 아직 남명(南明) 정권 및 반청을 표방하는 한인(漢人) 세력들이 다수 존재한다는 정보를 들은 조선 역시 정세의 추이를 조심스레 살피고 있었다.
남명 세력은 일본과의 무역을 통해 군자금을 확보하고자 했다. 그러나 남명과 일본의 교역이 대개 밀무역의 형태로 이루어졌기에 일본을 통치하던 막부는 이를 좋게 보지 않았다. 막부는 남명의 한인들 사이에 숨어 서양인 선교사 세력이 일본에 침투할 것을 우려하고 있기도 했다.
그렇기에 막부는 만약 조선이 바다에서 표류하는 한인을 잡으면 일본으로 송환해달라고 요청했다. 이는 조선에게 진퇴양난의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표류한 한인을 육로를 통해 청으로 보내야 하는가? 아니면 일본의 주장처럼 일본으로 압송해야하는가? 특히 조선에 표류한 한인들의 정체성은 만주족이 지배하는 청이 아니라, 남명 정권이라는 점에서 이는 크나큰 딜레마가 아닐 수 없었다.
걱정은 곧 현실화된다. 1647년(인조 25년) 복건성에서 출발한 배가 조선 근해에서 표류하는 일이 벌어진다. 해양 경비를 맡았던 조선 수군이 이를 왜구라 생각하여 서로 충돌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배는 불탔고 한인들은 체포되었다.
이경석을 포함한 조선 조정이 내놓은 대책은 무엇이었을까. 우선 한인들을 심문하여 남명의 정세와 상황에 대한 정보를 얻어내고자 했다. 그리고 논쟁 끝에 관례대로 이들을 일본이 아닌 청으로 보내기로 결정한다. 명분보다는 실리를 선택한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조선은 이를 외교적 기회로 삼고자 했다.
이경석이 주관하여 작성한 조선이 청에 보낸 요청서는 다음과 같았다. 일본이 만약 이를 빌미로 조선을 공격하면, 병자호란 이후 성지(城池)가 모두 망가지고, 병사들의 훈련을 하지 못한 조선은 이를 막아내기 어렵다는 사실을 언급했다. 그러면서 조선의 자강(自强)이 필요하다는 주장을 넌지시 전달했다. 국가의 현실적 이익을 위해 남명의 사람들을 청으로 송환하면서, 이를 통해 방어망과 군사력의 확충을 조심스레 모색한 것이었다.
하지만 사태는 조선 정부가 바람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명나라 토벌에 적극적으로 협력하지 않던 조선을 깊이 의심하던 청은 조선 정부가 표류한 한인들의 배를 구하지 않고, 의도적으로 약탈한 것이 아니냐며 직접 조사를 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또한 청은 조선이 병자호란 이후 체결된 약조를 어기고, 일본의 동태를 빌미로 군비의 확충과 ‘북벌’, 나아가 남명 정권과 모종의 협력을 진행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의심을 품었다.
청 조정의 냉랭한 분위기는 조선 조정에도 알려진다. 소현세자의 갑작스런 죽음 이후 왕위에 올라 정통성 문제에 민감했던 효종은 청 사신단의 방문 앞에서 지레 겁을 먹었다.
이경석은 자신이 직접 청 사신단을 마주하겠다고 자청하여, 의주로 먼저 나아가 청 사신단의 동태를 미리 점검하고, 효종에게 자세한 사정을 보고서로 올리면서 그를 안심시키고자 했다.
그리고 1650년 3월 드디어 사신단이 서울에 도착한다. 청 사신단은 조선 조정의 중신들을 모아두고 심문을 시작했다. 여기에서 이경석은 놀라운 모습을 보인다. 그는 청에게 보내는 공식 문서(奏文) 작성의 책임이 오롯이 자기에게 있다고 말했다.
이렇게 솔선수범하여 책임지는 모습을 보였지만, 그 누구도 쉽사리 자신도 참여했다고 인정한 사람이 없을 만큼 심문의 분위기는 매우 심각했다.
청 사신단은 이경석이 죽음으로 대가를 치러야 한다고 결론지었지만, 효종의 간청으로 이경석은 의주 근처 백마산성에 유배를 가는 것으로 타협을 본다. 이경석은 속으로 위기를 홀로 책임지고 막아낸 영웅이라고 자부했을까.
그가 유배 중에 쓴 「백마산기」를 보자.
“옛날의 군자 가운데 학문에 힘쓰는 자는 목숨을 다해 뜻을 이루고 경우에 따라 안분하였지, 위태롭다고 해서 마음을 끓이지는 않았다. 비록 칼과 톱(刀鋸), 가마솥(鼎鑊)이 앞뒤에 늘어서 있어도 눈은 이를 보지 않은 듯 하였으니, 오직 의를 따랐기 때문이었다. 지금 내가 학문에 뜻을 두었으나 힘써 실천하는 공이 이러한 경지에 이르지는 못했다. 그러니 무릇 접촉하는 것마다 두렵고 괴로워할 만한 것인데도 꼼짝하지 않는 까닭은 또한 완악해서 그런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돌에 지나지 않는다.”
이경석은 자신의 행동에 자부심을 느끼기보다는, 자신의 성정이 원래 그러하다며, 스스로를 한 번 더 낮추었다.
비난을 받을 것을 알면서도 책임을 질 때 앞장서서 질 줄 알며, 그런 자신을 스스로 돌이라고 말할 수 있는 해학과 겸손, 이경석이 보여준 모습은 책임을 지는 사람이 부족한 우리 시대에도 큰 울림을 준다.
특별기고 옥창준 교수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정치학 전공
한국학중앙연구원(https://grad.aks.ac.kr) 성남시 분당구 하오개로 323 소재 저작권자 ⓒ 비전성남,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