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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의 병풍 그림 가운데 ‘책가도’만큼 당시 사람들의 욕망과 취향을 생생히 보여주는 그림도 드물다. 책가도는 서가에 책뿐 아니라 문방사우, 도자기, 고동기, 화초, 이국의 과일 등을 함께 진열한 모습을 그린 장식화다.
이는 학문을 숭상하는 유교 사회의 상징뿐만 아니라, 책이라는 매개를 통해 지식과 교양, 그리고 세속적 욕망이 교차하는 공간의 풍경을 담았다고 할 수 있다.
책가도의 기원은 고동기와 화과(花果)를 그린 중국 송대의 박고화훼도와 명·청대의 기명절지도(器皿折枝圖), 다보각경도(多寶閣景圖) 등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그림1). 특히 이탈리아 선교사 낭세녕(郞世寧, Giuseppe Castiglione, 1688~1766)이 청 황실에서 그린 다보각경도의 영향으로, 정조 대 궁중에서도 책가도가 유행했다.
호학 군주였던 정조는 편전 어좌 뒤에 책가도 병풍을 세우고 대신들에게 감상하게 했다. 그는 애서가로서 “비록 책을 읽지 못하더라도 서점에 들어가 책을 어루만지기만 해도 마음이 흡족하다”는 송대 유학자 정자(程子)의 말에 공감하며, 바쁜 정무 속에서 책가도를 통해 위안을 얻었다고 한다.
정조 대 이후 책가도는 궁중뿐만 아니라 사대부 집안의 사랑방과 서재에서도 인기가 있었다. 이는 이규상(1727~1799)이 당시 상류층 집 벽에 책가도로 장식하는 것이 유행이었다고 했던 점에서도 확인된다(그림2).
책가도의 서책은 학문의 깊이와 교양을 상징했고, 그 주변을 장식한 기명과 화과는 세련된 안목을 드러내는 수단이었다.
19세기 유재건(1793~1880)은 집안에 책가도 병풍을 여러 폭 장식했는데, 그의 집을 방문한 이들이 병풍을 보고 책들이 서가에 가득한 것으로 착각했다가 가까이 살펴보고서야 그림임을 깨달았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이는 서양화법의 원근과 명암을 받아들인 사실적 묘사 덕분이었다. 사대부들은 그림 속의 책과 현실에서 누릴 수 없는 기물을 통해 책가도를 ‘눈으로 향유하는 공간’으로 삼았다.
이러한 문인 취향의 청완(淸玩)을 담은 책가도는 19세기 후반 이후 민간에 확산되면서 ‘아(雅)’의 취향에서 점차 ‘속(俗)’의 기복적 상징으로 변모한다.
민화 책거리는 서가 없이 화려한 장식장에 책과 기완을 무질서하게 쌓아 올리고, 여의(如意)나 잉어, 석류, 모란, 불수감 같은 길상적 소재를 더해 다산과 부귀를 기원했다.
심지어 표피 장막이나 사치품이 등장하여 신흥 부유층의 위세를 드러내는 욕망과 세속의 무대가 되기도 했다(그림3).
그럼에도 책가도는 여전히 ‘책’을 중심으로 한 세계였다. 책은 단지 지식의 저장소가 아니라, 손끝의 감촉과 종이 냄새, 그 무게를 통해 독자와 세계를 잇는 매개였다.
병풍 속 가득한 서책과 문방구는 실제로 읽히거나 쓰이지 않아도, ‘지식의 세계에서 머물고자 하는 마음’을 상징했다. 정조가 책가도 앞에서 느꼈던 위안은 바로 그 세계에 대한 동경이었을 것이다.
오늘날 삶의 풍경 속에서 책을 꽂은 서가는 더 이상 익숙하지 않다. 대신 디지털 화면 속 정보가 우리의 일상을 채운다.
클릭 한 번으로 수천 권의 책을 펼칠 수 있지만, 손끝에서 느껴지던 바스락거리는 종이 책장 넘기는 소리는 점점 잊혀 간다. 과거의 문인들이 책가도 병풍 앞에서 느꼈던 정취 깊은 ‘책의 풍속’은 이제 디지털 화면의 빛 속에서 사라지고 있다.
책가도가 보여주는 세계는 단순한 장식화가 아니라, 사유의 풍경을 응시하게 하는 창이었다. 그것은 ‘앎을 향한 인간의 열망’이 시각화된 공간이었다. 서책과 문방구, 도자기와 꽃이 어우러진 그 복잡한 조형의 세계는 지식이 곧 삶의 품격이던 시대의 정신적 초상이다.
오늘날의 디지털 독서 환경이 효율과 속도를 자랑할지라도, 책장을 넘기며 사물의 질감과 향을 느끼게 하는 ‘사유 공간’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책가도를 바라보는 일은 곧 사라져가는 서재의 풍경을 애도하는 일이다. 손끝의 감촉으로 사유하던 시대에서 스크롤의 속도로 지식을 소비하는 시대로 옮겨온 지금, 책가도는 우리에게 잊혀진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여전히 책 속에서 사유의 온도를 느낄 수 있는가?
특별기고 정은주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왕실문헌연구실장, 책임연구원)
한국학중앙연구원(https://www.aks.ac.kr) 성남시 분당구 하오개로 323 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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