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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_3·1운동 100주년] 3·1운동 100주년과 성남의 독립운동

  • 비전성남 | 기사입력 2019/02/22 [12:31] |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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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남의 독립운동가     © 비전성남
 
성남지역은 독립운동사에서 의병 항전에서부터 8·15 광복에 이르기까지 뚜렷한 발자취를 남기고 있다. 1895년 10월, 일본군이 명성황후를 잔혹하게 시해한 을미사변이 있었고, 그해 12월 30일 단발령이 공포되자 김하락, 심진원 등 1,600여 명 의병이 남한산성에서 서울진공작전을 구상했다. 이 작전은 비록 실패했지만 경상도로 이동해 끝까지 항전했다.

1905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을사늑약으로 한국의외교권을 빼앗은 데 이어, 1907년에는 정미7조약을 통해 한국의 군대를 해산하고 내정간섭을 하기에 이르렀다. 이 시기 성남 출신의 남상목 의병장이 문경·음성·안성·용인 일대에서 전투를 벌이다가 체포돼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했고, 윤치장 의병장은 양주 일대에서 능수능란하게 일본군을 공격했지만 밀고자로 인해 체포돼 사형을 선고받고 감옥생활을 하던 중 감형돼 15년 만에 풀려났다. 민족의 정수인 의병은 일본의 수탈과 국권의 침탈을 무력으로 물리치고 국권을 회복하고자 스스로 자신의 목숨까지 희생했던 열사들이었다.

의병 항전이 국권 수호를 위한 것이었다면, 3·1운동은 잃어버린 나라를 되찾기 위해 거국적으로 일어난 독립만세운동이다. 3·1운동은 인류평등의 대의와 민족자존의 정당한 권리를바탕으로 우리나라가 독립국임과 우리나라 사람들이 자주적권리를 지닌 국민이라는 것을 세계만방에 선언한 것이다. 이 선언으로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로 국민이 주인 되는 시대를 열고,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으로 이어져 오늘의 대한민국이 있게 됐다.

현재 성남지역인 광주군 중부·돌마·낙생·대왕 면을 중심으로펼쳐진 3·1운동은 3월 하순에 집중적으로 일어났으며 횃불 시위운동은 4월까지 지속됐다. 시위 형태는 태극기를 들고 독립만세를 크게 외치는 평화적 시위에서부터 밤에 산에서 횃불과 봉화를 올리며 만세를 부르는 횃불시위, 곤봉을 들고 관공서등을 공격하는 무력시위 등으로 전개됐다.

한백봉, 남태희 등이 이끈 돌마면과 낙생면의 연합시위 군중은 일본 측 기록인 <조선소요사건일람표>에 3천 명으로 기록 돼 있다. 중부면 탄리(지금의 수정구 일대) 주민 300명은 남한산성 안에 있던 면사무소로 가서 만세를 외쳤고, 대왕면에서는 돌마면 출신의 이시종 등이 <조선독립신문>을 낭독하면서 독립의 당위성을 주장하고 만세를 크게 외쳤다. 숯골의 김교상은 인쇄기를 보유하고 독립에 관한 각종 문서를 인쇄해 배포했다.

만세운동 참여 군중은 당시 성남지역 인구가 5천 명도 되지 않았기에 주민 대부분이 참여한 것으로 평가된다. 3·1운동 이후 독립운동의 방향은 민족 역량을 결집하는 것이었다. 1927년 2월 신간회가 창립돼 야학회, 강연회, 토론회, 체육회, 연극 활동 등을 통해 민족의 역량을 강화해 나갔다. 신간회 활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지도자들이 한백봉, 한순회 등이었다. 한순회는 천도교 광주교구장으로서 독립운동자금 마련과 독립운동가 연락, 일본의 패망을 기원하는 ‘멸왜기도(滅倭祈禱)운동’을 전개했다.

그 이후로도 남한산노동공조회, 광주공산당협의회, 광주공동조합 등의 단체가 항일운동을 이어나갔다. 남한산성에서 조직된 운동단체가 공장 밀집지역인 영등포와 인천까지 조직원을 파견했을 정도로 이 지역은 치열한 항일운동을 펼쳤던 것이다.
 
▲ 윤종준 성남문화원 부설 성남학연구소 상임위원     © 비전성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