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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서각 산책 ] 식목일(植木日)과 친경례(親耕禮)

  • 비전성남 | 기사입력 2019/04/23 [14:57] |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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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67년 친경과 누에, 고치따기 과정을 기록한 『친경의궤』    © 비전성남

 
봄날의 4월에 빨간색 공휴일 하나 없는 게 아쉽다. 이럴 때면 생각나는 게 식목일이다. 4월 5일이면 나무를 심기 위해 분주하던 때가 있었다. 1949년 공휴일로 제정된 식목일은 1960년잠시 제외된 적도 있지만 2005년까지 이어졌다. 이날이면 관공서를 중심으로 사람들이 산과 들로 나가서 나무를 심었다.

조선시대 이맘때면 중요한 행사가 친경례(親耕禮)였다. 식목일이 4월 5일로 정해진 것도 이 친경례와 관련됐다. 1493년 (성종24) 3월 10일(음력)에 성종이 선농단에 나아가 제사 지내고 몸소 쟁기질(親耕)을 했는데 그날을 양력으로 환산하면 4월5일이다. 친경례는 『예기』 「월령(月令)」에 나온다.

매년 정월에 좋은 날을 택해 천자가 신하들을 거느리고 몸소밭갈이를 하고 이를 끝내면 모두 모여 노주(勞酒)를 마셨다. 한대(漢代) 문제(文帝) 때부터 친경례 시 선농(先農)에게 제사했는데 이후 선농제는 친경례와 무관하게 매년 거행됐다. 서울 동대문 밖에 있는 선농단이나 선농제는 모두 이와 연관이 있다.

『예기』에는 친경을 정월에 거행하는 것으로 돼 있다. 이 규정을 좇아 고려시대에는 정월에 선농제를 지냈다. 그러나 우리나라 정월은 농사일을 시작하기에 이른 시기였다. 아직 땅이 다 녹지 않아서 쟁기질을 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조선시대에는 그 날짜를 경칩(驚蟄) 후 첫 ‘해일(亥日)’로 변경했는데 한식이나 청명 때였다.

농업사회였던 조선시대 친경례는 결코 소홀히 할 수 없는 중요한 의식이었다. 그런데 조선시대 친경례는 생각보다 많이 거행되지 않았다. 매년 선농제는 거행했지만 국왕의 친경례는 태조부터 순종 때까지 16회에 그쳤다. 왜 그랬을까?
 
이는 흥겨운 축제와 척박한 현실의 상충 때문이었다. 친경례는 농사일을 권면하는 의식이고 봄의 축제였다. 친경례는 궁궐 속에 있던 왕을 나오게 한다. 궁궐에서 선농단까지의 문, 도로, 교량 등은 색종이와 색천으로 꾸며지고, 화려한 의장과 가마가 그 길을 통과한다. 그 앞에 가면을 쓴 처용이나 재인(才人)들이 먼저 지나가며 분위기를 돋우었다.
 
환궁할 때면 기로(耆老), 유생(儒生), 기녀(妓女)들이 길에 나와 왕에게 가요를 바치며 그 업적을 칭송했다. 이 모든 것이 당시에 큰 볼거리였다. 사람들은 이를 ‘관광(觀光)’하기 위해 전날부터 천막을 치고 먹을거리를 장만했다. 양반이나 천민이나 모두 구경하러 거리로 나왔다. 이러한 분위기 때문에 친경례를 ‘태평성대’의 표상이라고 했다.

성종대 이후 여러 왕들이 친경례를 거행하려 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재난이 이어지면서 농사 걱정이 심해지고 풍년에 대한 바람도 간절해졌다. 왕은 친경례로써 백성을 권면하고 싶었다.
그러나 친경례에 딸린 축제적인 행사들이 재난의 상황에 맞지 않다며 그 실행은 유보됐다. 친경례보다 실질적인 정책이 중요하다는 주장이 앞섰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위기 상황은 말할 것도 없고 17세기 조선은 기근과 전염병으로 허덕이고 있었다. 이런 가운데 태평성대의 노래를 부를 수 없었다.

광해군 이후 100여 년이 지난 1739년, 영조가 마침내 친경례를 거행했다. 이때에도 흉년으로 허덕이는 시기였기에 친경례를 거행했지만 나례, 결채, 가요 등은 모두 제거했다. 친경례의 원래 목적인 권면(勸勉)과 중농(重農)의 정신을 살리려고 했다. 이후 영조는 세 번의 친경례를 더 거행했다. 농사일보다 그 행사에 즐거워했던 사람 역시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본말이 전도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우리는 축제의 시대에 살고 있다. 축제가 경제의 동력이 될 만큼 중시됐다. 축제가 없는 삶이란 안쓰럽지만 현실과 다른 축제도 원치 않는다. 내일의 희망과 노동의 건강함으로 가꾸는 귀한 축제의 봄이 되길 바란다.